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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롤 - 한개의 이야기

    한 남자가 있었다. 이남자가 어느정도로 독한 남자냐면, 상대방이 크리스마스날 가족과 단란하게 케이크를 사서 그 케이크에 촛불을 붙이려는 순간 집에 난입해서 전부 깡그리 뒤엎고 빚을 받아가는 사람이다. 그것도 우연히 타이밍이 좋은게 아니라 그 타이밍을 맞추려고 기다리는 남자라는것이다. 언젠가 내가 이 남자에게 가장 좋아하는 타이밍을 물었더니 채무자의 가족이 단란하게 모여있고, 분위기가 따사로울때가 가장 좋다고 했다. 물론 그 남자의 역활은 촛불을 붙이고 짝짝짝 박수를 치는 사람이 아니라 난입해서 깽판을 치는 인간이었다. 여튼 그런 남자와 나는 꽤나 오래되먹은 친구다. 무려 십년전부터 알고 지내서 서른이나 먹은 지금까지도 알고 지내니, 유소년과 청소년 시절은 함께하지 못했다고 해도 대학시절과 졸업 이후에 매년간 다 합칠경우 스트레이트로 다섯달도 넘는 시간들을 붙어다녔으니, 절친한 친구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것이다. 이 남자의 이야기를 묻는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두가지에 놀라는데 첫째는 그 남자가 대학을 나왔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나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과 그렇게 자주 만나서 노는 친한 친구라는 것이다. 아 물론 내가 좀 그런부류의 사람하고 안 어울리게 생기긴 했다. 난 순해빠져서 그냥 평범한 안경이나 끼고 오래 앉아 있어서 등과 어깨가 약하게 굽어있다. 그 남자는 뭐 람보같은 근육질은 아니지만 군살과 과장된 근육이 없고, 옷을 두껍게 껴입어도 그 옷속에 단단한 몸이 있을것 같아보이는 그런 사람이다 게다가 얼굴은 눈 끝이 날카로워서 평범하게 생긴 다른 부분까지 전부 날카롭게 만들어버린다. 외모 이야기는 이쯤하고 또 다시 크리스마스가 왔고, 나는 전화를 했다.

"너님아."
"너 회사 점심시간 끝나지 않았냐? 어떻게 전화를 하고 있냐?"
"그건 나님 문제니까 신경 끄셔도 되구여, 크리스마스에 수금하러 가지 말고 저랑 저녁이나 잡수시져."
"어감 나쁘게 수금이 뭐냐? 그냥 방문이라고 해도 되잖아."
"수금 맞잖아. 여튼 너 나랑 하루종일 붙어다니면서 밥이나 먹고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놀자."
"우리가 게이커플이냐? 남자새끼 둘이 하루종일 크리스마스에 붙어있게?"
"너 애인있음?"
"없지."
"나는?"
"너도 없잖아."
"그럼 너 나만큼 자주 붙어다니는 친구는 있냐?"
"......없는것 같다."
"나도 없거든. 고로 여기서 공식이 성립되는거야. 너님과 나는 친한 친구다, 근데 둘다 애인이 없다, 고로 같이 솔로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것은 지당한 사실이다. 어떠냐? 이 공식? 완벽하지 않음?"
"뭔가 미묘하게 비논리적인것 같은데."
"뭘 그런걸 일일이 따지시나여, 머리 복잡해짐. 여튼 나랑 그날 그냥 붙어다니는거다?"
"알았다. 너 과장한테 깨져서 울기전에 어서 업무로 복귀해."
"과장한테 깨지긴 해도 운적은 없거든?"
"넵. 믿어드리겠습니다."
"알았다. 끊어, 시간 조금만 더 끌면 과장한테 깨진다는 농담이 현실이 될것 같아."
"어 그래 저녁에 보자."

전화가 끊어졌다. 이로써 올해는 이놈이 한 단란한 가족의 크리스마스를 깨부수는 짓거리를 예방하게 되었다.  이 남자-친구란거 다 까발려졌으니 이제 좀 단순하게 표현을 해서 이놈-도 그저 나처럼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를 수행하는것일 뿐이지만, 그게 딱히 크리스마스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사실 저번에 말하기를 굳이 크리스마스에 할 필요는 없지만, 그 타이밍을 자신이 사랑해서 크리스마스에 그 깽판을 치노라고 고백한적이 있기때문에, 별로 큰 문제는 되지 않을것이다. 나는 핸드폰을 중지와 엄지를 이용해 허공으로 한번 튕겨내서 손으로 받은뒤에 내 조그맣고 안락하지 못한 책상으로 향했다. 근무가 끝나려면 아직 여섯시간이나 남았고, 크리스마스는 이틀이 남았다. 내일은 바햐흐로 크리스마스 이브인것이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다. 사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해봤자 진짜 별거 없다. 내가 애인이라도 있었으면 중가의 와인한병과 조그마한 딸기 생크림케이크라도 사서 로맨틱한 밤-캬 좋다.-을 만들었을지 몰라도, 나는 이즈음만 되면 비참해지는 솔로라서 그런것은 다 꿈이다. 하지만 부모님과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엘리트 사촌 여동생을 위해서 큰 사이즈의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사가지고 들어가기로 했다.  왜 친동생도 아닌 사촌 여동생하고 같이 사냐고 물어보면, 나의 위대하고 강하신 사촌 여동생님은 한국의 모두가 칭송하는 그 대학의 법학과에 들어가셨는데, 이모댁이 좀 떨어진 동탄신도시에 사시는터라 서울에 사는 우리집에 같이 살고 있다. 덕분에 나는 집에서 다 떨어진 티에 짧은 반바지만 입고 편하게 뒹굴지도 못한다. 뭐 법학과라고 다 엘리트가 되란 법은 없겠지만, 국가가 공인하신 천재 법학도라서 엘리트라고 불러도 될것같다. 본인은 그렇게 불리는걸 무척이나 싫어하는것 같지만. 게다가 귀엽게 생겼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분은 그 유명하신 엄친딸이라는 이야기지.

각설하고, 회사에서 길을 가다보면 괜찮은 빵집이 하나 있다. 이름은 런던 바게트리. 유명하신 모 빵체인점의 이름을 괴악한 센스로 패러디한것 같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왜냐면 이 집의 딸기 생크림 케이크는 꽤 맛있고, 나는 거기에 만족하기 때문에, 주인장의 괴악한 네이밍 센스따위는 내 알바가 아니라는거지. 딸기 생크림 케이크의 좋은 맛에 비해 다른 케이크의 맛은 조금 평범해서 문제긴하지만 보통의 잡동사니 빵의 맛도 훌룡하기때문에 딸기 생크림 케이크와 보통 빵을 사러갈때는 이곳을 언제나 애용하고 있다.

"어서오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아주머니."
"오 총각 왔어?"
"예, 크리스마스이브라서 케이크 사러 왔어요. 맨날 사가는 케이크 라지 사이즈로 한개 포장해서 주세요. 크리스마스 케이크니까 폭죽만 받아갈께요."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요."

아주머니가 케이크 상자를 가지러 카운터 뒤로 사라진 동안 나는 쿠폰을 찾기 위해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여동생과 내가 빵을 살때마다 받은 도장이 찍힌 쿠폰은 어느새 스무개를 넘어서, 우유식빵을 공짜로 얻어갈 속셈이었기때문이다. 깜빡하고 바꿔가지 않으면 강인하신 여동생님께 눈빛 공격과 더불어 팔뚝에 꼬집힘을 당할테니 반드시 사가야 했다. 난 그 꼬집힐때의 아픈 감각이 미치도록 싫다. 그나저나 아침에 오른쪽 주머니에 쿠폰을 넣어뒀는데 없다. 어라?

"아씨 어디 간거야?"
"뭐가 사라졌어?"

때마침 타이밍 좋게 복귀하신 아주머니가 내 혼잣말을 듣더니 나에게 물었다.

"아 쿠폰이요. 스무장 모았거든요. 동생이 우유식빵으로 바꿔오라고 해서요."
"그 다른쪽 주머니도 찾아보지 그래?"
"안그래도 찾아보고 있습니다. 아 씨 이게 어디 간거지?"

나는 오른쪽 주머니와 왼쪽 주머니를 탈탈 털었지만 쿠폰은 나오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순차적으로 바지 뒷주머니와 가방을 털었지만 여전히 쿠폰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 주머니들을 터는 동안 빵집 아주머니는 케이크 포장을 마쳤고 나는 우유식빵 없이 케이크만 가지고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가자 부모님 두분은 한가롭게 티비를 보고 계셨고, 여동생은 티셔츠와 긴 츄리닝 바지를 입은채로 다리를 가슴께로 모아 앉아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면서 부모님이 앉아계신 소파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넥타이를 대충 끌러두고 옆에서 같이 티비를 보고 있자니 여동생이 컴퓨터를 끄고 내가 사온 케이크를 보고서는 식빵은 안 사왔냐고 물어봤다. 나는 쿠폰을 잃어버렸다고 대답했고, 여동생은 방에서 한참을 뒤적거리더니 내게 쿠폰을 가지고 왔다.

"이 쿠폰을 왜 니가 가지고 있는거냐?"
"아침에 오빠 준다는거 깜빡했어 헤헤."
"난 내가 가지고 있는줄 알고 빵집에서 주머니란 주머니는 죄다 터는 꼴불견을 연출했는데, 그럼 그게 다 뻘짓이었단 말야?"
"미안해. 지금 같이 다녀오자."
"너님 혼자가면 안될까요? 전 방금 집으로 귀환하신 몸이라 피로가 쌓여있습니다."
"이렇게 귀여운 여동생을 무서운 밤길에 혼자 나가라고? 우와 동생 걱정은 털끝만큼도 안하네, 오빠 맞아?"
"내가 고등학교를 다닌 미국땅은 여기보다 치안이 후졌거든요? 여자가 맘놓고 밤길을 다닐수 있는 몇 안되는 나라가 우리나라인데 무서운 밤길은 무슨."
"그럼 그냥 이유없이 같이 가줘."
"싫습니다."
"붕어빵 사줄께."
"슈크림반 팥반."
"그럼 비싸."
"그럼 안갑니다."
"알았어 사주면 되잖아. 서른이나 먹어서 이십대인 동생한테 붕어빵이나 뜯고 말야."
"내가 누구때문에 빵집에 두번가는데, 불평은 내가 해야 되니까 옷이나 갈아입어."
"알았어. 티비보고 있어."

동생은 그러면서 기껏 끌러둔 내 넥타이를 조여주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나는 한숨을 쉰뒤에 일어나서 패딩 점퍼를 다시 껴입었다. 동생은 곧 차려입고 나왔고 부모님은 동생의 차림새에 목도리와 털모자를 추가시켰다.-바깥에 추우니까 단단하게 차려입고 가야지, 안그러면 감기걸린다.- 집에 들어오기 전에 비해서 바깥은 더 추워져있었고 우리는 손을 주머니에 깊숙하게 찔러넣고 빵집으로 향했다.

빵집에서 우유식빵을 쿠폰과 바꿔서-부당하게도, 이 식빵은 내가 들게되었다. 가위바위보는 악마의 게임인게 분명하다. 거기에, 삼세판이라는 규칙은 악마의 규칙임에 틀림없다. 분명 첫판은 내가 이겼다.-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오는길에 나는 동생이 약속한 팥과 슈크림이 세개씩 담긴 붕어빵 여섯개가 들은 종이봉투를 획득했고,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띄운채, 한개씩밖에 못먹었다. 여동생이 두개를 해치웠고, 두개는 부모님의 것이었다. 적어도 네개는 내것이어야함이 분명했지만, 이 영악한 엘리트님께서는 내가 식빵을 든 손을 바꾸느라 내게서 붕어빵을 잠시 맡아둔 사이에 두개를 몰래 빼갔다.-그리고는 뻔뻔스럽게도 사랑하는 동생에게 그정도도 못주냐고 투덜거렸다. 이건 내 정당한 권리였다고!- 나는 투덜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붕어빵 두개를 드리고 조금 있다가 가족과 함께 나란히 둘러앉아서 케이크를 잘라 먹은뒤에 잠이 들었다. 내일은 크리스마스다.


    아침에 일어나니 가족들은 모두 잠을 자고 있었다. 시간은 아침 7시. 크리스마스라서 가족들 누구도 일찍 나갈일은 없는것 같다. 아침에 딱히 할일도 없고, 크리스마스 아침에 컴퓨터를 하는것도 꼴사납게 느껴져서 나는 간단하고 씻고 어제 쿠폰과 바꿔온 우유식빵세쪽과 우유한잔을 마신뒤에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갔다. 친구놈과의 약속은 세시쯤에나 시작이었고, 그냥 간단하게 뒷산의 운동기구가 모인곳까지 다녀올 생각이었다.

평소에 가끔 올때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라서 다들 뻗어버린건지 운동기구가 모여있는곳에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덕분에 모든 철제 운동기구는 차가웠고, 나는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기구들을 건드렸다. 조금 땀이 나기시작하는걸 느끼고는 기구 사용을 그만 두었다. 뭐랄까. 아침부터 땀을 흘리는것은 내 취향에 벗어난 행동이고, 게다가 오늘은 약속까지 잡힌 크리스마스였다. 내려오는 길에는 사람들을 한두명 볼 수 있었다. 나는 간단한 아침인사를 건네면서 산을 내려왔고, 집에 거의 도달하고 나서야 내가 아침인사를 좋은 아침입니다가 아닌 굿모닝을 해버렸다는것을 깨달았다. 뭐 이정도는 별 문제 없겠지.

집에 돌아가보니 한시간 가량이 지나있었다. 부모님 두분은 깨셔서 아버지는 어제 신문을, 어머니는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다. 나는 점퍼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둔 후에 동생을 깨웠다. 미인이 되기 위해서는 더 자야한다는 잠꼬대를 무시한뒤에 창문을 열어 차가운 아침공기와 여동생의 만남을 주선시켜주었다. 부끄러워서 이불속으로 숨는 동생의 이불을 뺏는것으로 내가 친히 주선한 미팅은 흡족하게 마무리 되었다.

아침을 먹고 컴퓨터를 켜서 메신저에 접속하자 친구놈이 있었다. 나는 대화창을 열어서 약속에 대해서 세부적인 논의를 했고, 최종적으로 세시 반에 집에서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다음에는 노래방에 가서 솔로 둘이 궁상맞게 노래를 부르고 영화관에 가서 최근에 개봉한 SF영화인 지구가 빨빨거리며 살아다니는 날을 관람한 후에 친구가 잘 아는 맥주집으로 가서 수다를 떠들다가 축구를 보고 각자 집으로 들어가는 참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지극히 솔로다운 계획이었다. 이 모든 논의를 옆에서 지켜본 동생은 궁상맞고 참신한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계획이라는 평가를 내렸지만 여동생 본인도 솔로라서 그 이상의 비평은 받지 않았다. 뭐 참신하지 않더라도 재미만 있으면 되니까 별 상관은 없지.

시간은 꾸역꾸역 지나가더니 세시가 되었다. 나는 머리를 감고 옷을 두겁게 걸쳐입은뒤에 여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느린 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가서 세시반까지 기다렸다. 친구는 세시 이십오분경에 도착했고 우리는 대충 서울 시내로 가는 지하철에 올라섰다. 강남역부근에서 내려서 노래방을 가서 어깨동무를 하고 캐롤 열몇곡을 불러제낀다음 예매해둔 영화를 봤다. 영화는 그럭저럭 재미가 있었다. 지구라는 행성이 진짜로 빨빨거리면서 은하계를 여행하려는 미친계획을 짜는통에 거기에 살고 계시는 전 인류와 동물씨들이 지구 내부에 찾아가서 지구의 영혼과 한판 떠서 닥치고 본래 궤도를 돌게 만든다는 조금 정신이 나간 영화였다. SF라더니 거의 코미디 수준이었는데 우리 둘다 별로 불만은 없었다. 우리는 영화관 출구에 있는 쓰레기통에 깔끔하게 빈 팝콘통과 얼음까지 씹어먹어서 완벽하게 비어있는 콜라통을 버리면서 잡담을 떠들었다.

"그나저나 이 정신나간 시나리오는 어떤놈이 쓴건지 얼굴을 좀 보고싶다. 이거 미국에서 흥행은 했냐?"
"의외로 흥행한 모양이던데?"
"신기하군. 니가 보기에 이 영화가 양키한테 먹힐만한 영화냐?"
"미국땅 안밞은지 몇년째인데 그걸 나한테 묻냐, 차라리 지나가는 외국인한테 물어봐."
"나 영어 못해. 니가 물어봐."
"귀찮아."
"꺼져."
"즐"
"즐"
"..."

이런식의 대화로 시간을 따먹으면서 우리는 친구가 미리 예약을 해둔 맥주집으로 걸어갔다. 축구를 안락하게 보면서 맥주를 마실수 있게해둔곳은 한국에 흔하지 않다. 여기가 축구에 미쳐사는 남자들이 깔려있는 유럽이 아니기 때문인데, 그런 희귀한 맥주집을 이 친구는 한개 알고 있었고, 심지어 단골이기까지 했다. 케이리그를 보러가도 괜찮겠지만 지금은 시즌도 끝났고, 설사 시즌중이라도 올해 크리스마스는 주중이라서.

"근데 오늘 축구 하냐?"
"글쎄다. 가보면 알것 같은데."
"뭐 축구 안해도 떠들면서 우리의 불행을 안주삼아 씹고 맥주를 마시면 되니까 별 문제는 없겠네."
"왜 하필 우리의 불행이냐."
"축구 못보잖아."
"..."

우려한대로 축구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술집의 맥주는 마실만한 맛을 자랑하고, 크리스마스에 칙칙한 남자 두명만 방문한것을 안쓰럽게 여긴 주인이 무료로 안주를 주었기때문에 슬프긴 하지만 우리는 나름 행운아였다. 축구이야기-발렌시아 바르샤랑 레알한테 발렸다며? 니들 우승은 못하겠네.-부터 시작해서 정치이야기-공성전 끝내주던데?-까지, 뇌속에서 떠도는 이야기란 이야기는 다 끄집어 내면서 떠들던 우리는 순간적으로 이야기거리가 떨어지는 어색한 순간을 맞이했다. 수십초간 서로 자신의 맥주잔만 바로보던 우리는 잠시 테이블을 떠서 머리를 회전시키기로 했다. 나는 속을 비우고 새로운 맥주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기 위해서 화장실로 향했고, 친구는 담배를 한대만 피우고 온다고 바깥으로 나갔다. 오분뒤에 손을 두번씩 씻어서 청결한 위생상태로 테이블로 돌아온 나는 무려 오분씩이나 더 친구의 귀환을 기다려야 했다. 평소 담배 한대에 칠분정도밖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 사람이 십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나는 불안해서 바깥에 나가보기로 했다. 바깥은 겨울다운 추위를 자랑하고 있었고, 바깥에 오랜시간 머무르고 싶은 마음따위는 싹 가시게 해주는 날씨였다. 입구 바로 앞에 친구가 없어서 나는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 담배를 입에 물던가 손에 들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내가 찾은 친구는 담배를 입에 물거나 손에 든 모습은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과 같이 있는 모습이었다. 아니 정정, 그건 성인이 아니라 꼬맹이 하나였다.

"...그러니까 이 최첨단 시대에 성냥이나 쥐어주고서 여기로 안돌아 온다는거야?"

심지어 질문까지 하고계셨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친구에게 다가가서 뭐하고 있냐고 물었고 친구는 아무 말 없어 몸을 조금 움직여서 자신의 대화상대를 나에게 노출시켰다. 그나이 또래가 가질법한 레벨보다 조금 더 많은 귀여움을 가지고 있는 여자아이였다. 몸은 털모자가 달린 두터운 오리털 점퍼로 둘러져있었고, 귀여운 핑크색 벙어리 장갑을 쓰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추워보이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한가지 오류라면, 왼손에 성냥걉을 두개나 들고 있다는것이었다.

"얘는 왜 이 시대와 장소에 어울리지않는 성냥갑을 두갑이나 들고있냐?"
"어른 둘이 자기한테 성냥갑 두갑 쥐어주고 사라졌다는데..."
"부모냐?"
"아니라고 빌고싶긴한데, 일단 생물학적으로는 부모인 모양이다."
"생물학적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뭐냐?"
"어린애가 자기 부모를 어른 두명이라고 표현하는거 본적 있냐?"
"없긴한데, 그러면 생물학적으로 부모일 가능성도 없는거 아냐?"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자, 꼬맹이앞에서 따지지말고."
"어."

친구는 손을 들어서 대화를 중단 시킨뒤에 다시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어린애답지않은 얼굴이었기때문에 나는 영 어색한 기분을 느껴야만했다. 친구는 몇마디를 더 주고 받더니 나에게 이 아이를 일단 술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몸이라도 녹여주자는 제안을 했고, 나는 별 반대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친구는 이 술집의 단골이었기때문에 주인은 우리가 있는 동안만이라는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아이를 흔쾌히 맡아주었다. 우리는 우리 자리로 돌아가서 아까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자 이제 저 아이를 두고간 어른 두명씨가 생물학적인 부모인 이유를 언급해봐."
"주저하기는 했지만 대화의 초반에 엄마라는 단어를 썼거든."
"그 어른 두명을 지칭하는게 아닐지도 모르잖아."
"맞아, 근데 내 감으로는 그들이 부모이긴 부모일것 같아."
"어떤 정신나간 부모가 아이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로 춥고 잔혹한 현실을 선물하냐?"
"저아이 부모."
"...내가 졌다, 그래서 저 아이 어쩌려고? 경찰에 맡기려고?"
"아니."
"설마 너님이 기르시게요?"
"모르겠는데."
"그냥 속편하게 경찰로 넘기면 알아서 찾아주거나 시설에 맡겨서 양부모를 얻을수 있을텐데?"
"내가 그 루트를 신뢰하지 못한다는거 니가 더 잘 아는 사실이잖아."
"하긴, 그 루트 잘못 타면 깡패랑 창녀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해줬지."
"어, 그리고 난 어쩌다가 만난애까지 그렇게 만들긴 싫어."
"난 못 돌봐준다. 일단 난 분가도 안했다고."
"니 집 사정이야 내가 잘 알지. 부탁할 마음 없다."
"그럼 진짜 어쩌려고?"
"일단 오늘밤은 우리집에서 재울생각인데. 그 다음은 모르겠다."
"크리스마스라서 그런거냐?"
"뭐가?"
"아니다... 두잔만 더 마시고 뜨자. 곧 있으면 경찰 단속 나오겠네. 그러면 저기 맘 좋으신 주인씨 고달파진다."
"난 이것만 마실련다."
"어."

그 대화를 끝으로 나와 친구는 단숨에 약속한 잔을 비웠다. 더치페이로 계산을 하고 주인이 준 박하사탕을 까먹으면서 바깥에 나오니 그새 더 추워져있었다. 나는 거부하는 친구를 강제로 택시에 태워서 보냈다. 우리집과 별로 멀지 않아서 택시비용은 잘 알고 있었다. 친구는 나랑 지하철을 타면 된다고 했지만, 난 그 꼬맹이를 들고서 지하철을 탈 자신이 별로 없었다. 친구가 무슨 선택을 한건지는 모르겠고, 이해도 되지 않았기에 더욱 자신이 없었다. 택시가 커브길을 돌때까지 손을 흔들어준뒤에 나는 지하철역으로 향하면서 핸드폰을 꺼내서 집에 전화를 했다. 넉넉잡아 한시간반이면 도착한다고 말해두고 전화를 끊었다.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러브 픽셔널리도 보지 못하고 괴상한 사건과 함께 마무리되어버렸다.


    그뒤로 한달간 나랑 친구는 전혀 만나지 못했다. 연말에는 망년회가 사람을 미치도록 굴린다면 연초에는 각종 계획과 친척집 순회가 사람을 연말의 두배정도로 굴리기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친척형이나 누나가 없는 말그대로 최고참이라 애인은 있냐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결혼이야기에 직장내에서 승진이야기까지 온갖 질문에까지 대답하느라 더욱 진이 빠져버린다. 그러한 사정으로 1월말이 되서야 나는 친구에게 연락을 할 수 있었다. 목소리에 연초의 피곤함이 묻어나기는 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별로 변한것이 없는 친구의 목소리는 반가웠고, 전화비도 아낄겸 바깥에서 만나기로 했다.

새해의 첫 만남은 경악으로 시작되었다.

"너 임마 눈이 왜그래?"
"응?"
"눈! 눈말이다! 네놈 눈! 아이! 그거 왜그래?"
"아 좀 안좋아 보이냐?"
"좋고자시고를 떠나서 눈매가 왜 한달만에 바뀌어있냐고!"

한달만에 만난 친구는 인상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얼굴 전체를 날카롭게 보이게 하던 눈매가 둥글둥글하게 변해버렸기때문이다. 대체 무슨짓을 하면 저렇게 되는걸까해서 물어보니 성형을 했단다. 평소에 자기 외모에 만족하고 성형과는 거리가 멀던 인간이 성형을 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이유를 물어보았다.

"들으면 니가 웃을텐데. 기가 막혀서."
"한달사이에 무슨 짓을 저지르셨습니까."

예고당한대로, 들은 내용은 기가 막혔다.

"그 길고 긴 이야기를 짧게줄여서 말하면 그 꼬마아이를 무려 네 여동생으로 호적에 올리고, 니 눈매가 무서워서 자꾸 우는 바람에 웃게 해주려고 눈매를 성형했다고? 크리스마스 난입을 사랑하던 나의 친구는 어디로 사라진거냐. 너 임마 도플갱어지?"
"아니. 애석하게도 진짜다."
"진짜 도플갱어 아니야?"
"아니야. 정 뭐하면 너랑 나만 아는 비밀들을 세시간동안 큰 목소리로 낭독할수도 있다."
"그만, 믿어주마."

나는 만담같은 대화에서 먼저 백기를 든 후에 테이크아웃 컵에 담긴 커피를 마셨다. 커피맛이 상당히 괴상했다. 커피 원두가 살아나서 혀를 끈적하게 휘감는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간신히 삼키고 나서 궁금한점들을 물어봤다.

"대체 어쩌다가 길에서 만난 꼬맹이를 호적에까지 올리게된거냐?"
"그게 말이지, 난 처음에는 내가 말한대로 며칠만 재워주고 친부모를 찾아줄 계획이었거든..."

내 커피를 뺏어마시면서 친구가 말해준 이야기는 고난과 예측불가의 이야기였다. 재워주는 처음 며칠동안 친구는 경찰서와 우리가 갔던 술집이 있는 동의 동사무소와 그 주변 지역의 동사무소를 꼬맹이 사진들고 찾아다니면서 친부모를 찾아다녔다. 동사무소쪽은 꽤나 빠르게 백기를 들었고, 경찰서는 조금 더 분투하긴 했지만, 아직 지문 등록도 안한 꼬맹이라서 결국은 백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시설에 보낼까 했는데 부모님이 연초에 집에 들어오지않는 자신이 괘씸해서 친척들을 보냈고, 꼬맹이는 얼떨결에 같이 친구네 본가에 따라가게되었다. 친구는 거기에서 온갖 추궁을 당했다. 동거한 여자가 낳고 튀었냐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납치라도 했냐는 질문까지 받았고, 친구는 한참이나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했다.-길에서 떨고 있길래 데리고 온거라구요!-모두가 꼬맹이의 습득과정을 납득하자 뒷일에 대한 논의가 나왔다. 친구는 한참동안 자신의 노력에 대해서 떠들어댔고, 막판에 가서 성과가 하나도 없었노라고 힘이 빠진 목소리로 고백했다. 모든 이야기를 듣던 친구의 부모님은 친구에게 "네놈이 주워왔고, 아무리 찾아도 보내야할 곳이 없다면 네놈이 직접 키워야지."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의 부모님은 운명론을 꽤나 신봉하시는 분이었고, 꼬맹이와 친구가 만난것을 운명비슷한것으로 판단해버리신것이다. 그뒤에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호적등록을 비롯해서 모든 절차가 끝나버렸고, 친구는 졸지간에 동생이 되버린 꼬맹이를 양육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거구만, 뭔가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내가 생각해도 그래."
"그래서 네 부모님은 네가 그 '동생'을 양육하길 바라신다는거지?"
"귀찮게도 말이다."
"일이개월뒤면 새학기가 시작될텐데, 학교 수속은 해뒀냐."
"아 그거 깜빡했다."
"하러가자."
"응?"
"지금 하러가자고, 지금이면 교육청도 문 다 열었으니까."
"어...어, 그래."

나는 커피컵을 흔들어서 커피가 남아있나 확인했다. 컵은 비어 있었고, 나는 주변에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커피컵이 쓰레기통 바닥에 부딫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곧 친구의 발소리가 덮었다.

"야 근데 교육청이 어디냐?"

내가 물었다. 날씨는 조금 풀려서 덜 추웠다. 교육청 가는길에 눈 성형한 이야기나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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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올렸습니다.

사실은 아무런 사건도 없이 그냥 평범하게 어물쩍 끝나는 날들을 쓰고 싶었는데 다 쓰고서 주변에 읽어보라고 했더니 심심해서 졸린다는 의견이 하나 나와서 그냥  대충 사건을 하나 집어넣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맞아서 쓴다고 쓴건데요. 재미는 있는지 모르겠네요.

재밌게 읽으셨다면 좋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즐겁게 지내시길.

by 은혈의륜 | 2008/12/25 10:00 | | 트랙백 | 덧글(8)

종이 씹는 남자 (2)

종이 씹는 남자 (1)

    날씨는 여름치고 추웠다. 인디안 섬머의 기온 하락버전이 이 나라에 존재하는것도 아닐텐데, 여름답지 않게 추웠다. 어차피 가스탄들이 피부에 닿는것을 방지해보려고 긴팔 재킷을 걸치고 나와서 날씨는 크게 문제가 되는것은 아니었다. 대로의 시끄러움과 달리 적막이 가득 채운 동네의 골목길은 위화감으로 덧칠되어 있었고, 후배는 내 손을 놓치 않은채 나를 이끌고 있었다. 종이만 무의식적으로 씹을뿐, 생각하기에는 두뇌가 너무 몽롱한 나머지 나는 그저 그 손이 나를 이끄는대로 따라갔다. 마치 죽은 사람이 천사의 손에 잡혀 천국으로 인도되는 기분이었다. 어디에선가 도착이라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때는 시야가 많이 흐릿했다. 눈에 들러붙은 눈곱의 탓인가 싶어서 눈을 오른손으로 비볐더니 그나마 조금 나았다. 조금 또렷해진 시력으로 보이는건 베이지색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천장이었다. 천장이 보인다는건, 내가 누워있다는 뜻이겠지 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입속에 있던 씹던 종이가 걱정이 됬다. 몇년전 그냥 자다가 종이가 목에 걸려서 한동안 괴로워했기때문에 잔뜩 긴장하면서 혀를 굴렸다. 종이가 없었다. 더 심각하게 불안해지려던 찰나, 아랫입술과 잇몸 사이에 이물질이 껴있는걸 느끼고 재빠르게 혀를 가져다 대었다. 딱딱한게, 종이는 아니었다. 혀를 굴려서 빼내어, 고개를 돌리고 손바닥위에 뱉어내자, 조그마한 돌조각이었다. 억지기침으로 목에 자극을 줘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때, 배게 옆에서 뒹구는 종이가 보였다. 아스팔트와 넘어졌을때도 이 각도였다. 아스팔트에 넘어진 일이 데자뷰로 느껴질정도로 각도가 비슷해서, 좀 소름이 끼쳤다. 약간 삐걱거리는 몸으로 열심히 양팔을 쓰다듬을때, 방문이 열리더니 후배가 들어왔다.

"정신을 차렸네요."
"어... 내가 얼마나 누워있던거야?"
"두시간쯤? 그렇게 오래 누워있던건 아니에요."

    기절한 사람이 일어나면 묻는 질문 첫번째를 마치고 나는 기절한 사람이 일어나면 묻는 질문 두번째와 세번째를 물었다.

"여긴 어디고 또 나는 누구지?"
"여긴 저희집이고, 저 먼저 알아봐 놓고서 기억상실인척 개그하면 재미없거든요."

    아, 들켰다. 장단좀 맞춰주지. 라고 생각하면서 실없이 웃었다. 평소에는 이런상황이 닥치면 뒷머리를 긁거나 혀를 내미는 버릇이 있지만 지금은 이상할정도로 체력이 없었다. 후배는 그 미소에 앞으로 이런 재미없는 개그하면 쫓아낼거에요 라고, 매정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냥 이 집에서 개그는 시도도 하지 말아야지. 썰렁한 개그 한번 한거 가지고 구박한 후배에게 속으로 매정하다드니, 환자를 배려하지 않는다더니 하면서 투덜거리던 나는 후배가 갑자기 째려보자 생각을 확 멈췄다.

"...왜 갑자기 째려보고 그러냐?"
"지금 속으로 투덜거렸죠? 썰렁개그 좀 이해해주면 덧냐나면서."
"아니. 내가 뭣하러 그런짓을 하겠냐. 안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근데 왜 입은 댓발이나 튀어나왔어요?"

    예리하기도 하셔라. 2차전에서도 패배한 나는 그냥 아무말도 없이 눈을 감았다. 웃어도 역효과, 화내면 베드엔딩. 이럴때는 환자답게 잠이나 자는게 가장 좋은 일이다. 양 한마리, 양 두마리, 양 세마리......


"선배, 자요? 자요? 자냐니까? 대답이 없는걸 보니 진짜 자나보네."

    선배가 자는걸 확인하고 방에서 나왔다. 방하나와 주방을 겸한 거실이 있는 조그마한 집. 평소에는 구불거리는 골목길을 한참 들어와야하는 지리적 상황에 욕만 했지만, 이런 위기상황에서는 오히려 그런 지리적 불편함이 고마웠다. 전경과 사복경찰들의 주의가 다른곳에 돌려진 틈을 타서 빠져나온것이니, 그들이 여기까지 쫓아올 수는 없을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식의 시위는 처음이었지..."

방금전에 빠져나온 시위현장을 떠올리자 몸이 으슬으슬한 한기를 느꼈다. 지금 데리고 온 윤호선배가 가끔 시위현장이 얼마나 지랄맞은지 이야기 해주기는 했지만, 자기자신을 어느정도 공산주의자라고 부르는 선배의 말에는 언제나 과장이 섞여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최루탄이나 가스탄 투척은 몇십년은 된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자신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겨누고 투척되는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도로에 쓰러진 선배를 바라보자 그제서야 자신이 그 장소에 간 이유를 알아내고 간신히 선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텔레비전에서 방송해주는 시위는 그저 평화롭게 피켓을 들고 소리를 지르는것 뿐이었지만, 그것조차 엄청나게 강력한 시위라고 생각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침대는 환자에게 넘겼기때문에,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잠을 청했다. 좀 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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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안써지는군요(...)

by 은혈의륜 | 2008/12/05 09:27 | | 트랙백 | 덧글(4)

신을 사랑하던 시절: 사랑에 대한 이야기.

당신에게는 신을 사랑하던 시절이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면 많은 종교인들은 먼저 나에게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주곤 한다. 신을 사랑하던 시절이 아니라 신을 사랑한 시절이라고 해야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나에게 자신들이 신을 사랑하는 시절은 처음부터, 영원까지라고 말한다.

신을 사랑하냐는 단순한 질문이 내 귀에 들어온것은 한참 전에 일이었다.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가장 자주 듣는말중에 하나는 예수 사랑해요라는 찬송가의 가사였기때문에, 자연스럽게 많이 들을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나는 그 찬양을 따라부르고 있었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들이 날 옭아매거나, 주변에게 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는것은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돌아오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물으신다면, 그쪽은 신을 사랑하시던 시절이 있습니까.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냐면 상대방이 신이라는것이기 이전에, 그 이후에 나온 사랑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정립된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해서 감정적이 아닌 이성적으로 파고들어간 모든 것들은 사랑이란 몇가지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아가페와 에로스같은 것인데, 아가페적인 사랑은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부류의 사랑이고, 에로스의 경우는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간이 쏟아내는 사랑의 감정이라고 배웠다. 사랑은 가장 위대한 명제라는 이야기를 듣던 나에게 이런 부류는 언제나 혼란스러웠다. 왜 그렇게 위대한 명제를 갈래갈래 쪼개는거지 라는 물음이 뒤따라오곤 했기때문에.

하지만 이런 의문을 품었다고 해도, 내가 그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심하거나 연구해본적은 거의 없다고 하는것이 가장 옳을것이다. 아가페적인 사랑을 하려면 나는 부모가 되거나 혹은 내 보호가 절실한 상대방이 필요할테지만, 나는 오히려 아가페적인것들을 받는 존재이고, 내가 누군가를 보호해줄만큼 성장했다는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에로스는? 에로스적인 사랑이라면 당연히 내가 애인을 만든다는 전제가 성립되어야 하지만, 사실 매일같이 여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불러도 실제로는 그다지 사귀고 싶은 생각이라는것이 별로 없다. 물론, 상대방이 나를 원한다면 몰라도, 어떤것의 영향인지는 나조차 전혀 알 수가 없지만, 나에게는 전역전까지 누군가를 사귄다는것을 깊게 생각해본적이 없다. 이것에 대해서 굳이 따지자면, 나는 이별을 두려워 하는것인지도 모른다. 이별이라는것은 언제나 가슴이 아픈법이고, 그 누구도 그런것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비물리학적인 가슴은 존재하는것인지도 희미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가슴의 존재를 믿는다. 그리고 나도 믿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소중히 하기에, 그 가슴에 가장 아픔 상처를 입힐수 있는 이별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특히, 나는 약간 두려워하는면도 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이라면, 나는 그들과 연락이 되지 않는것에 항상 불안해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한 신에 대한 사랑은 대체 어떤 종류의 것일까 라고 생각하면 복잡해져왔다. 자신을 지키는 존재에게 인간이 품는 대부분의 감정은 동경 혹은 존경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어야 마땅하지만, 그들은 굳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여 말한다. 우리는 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요?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세상에는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수억가지의 질문이 있지만, 결코 대답하지 못할 질문중 하나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정도로 이 질문은 어렵다. 무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에 버금갈 정도로 말이다.

내게는 신을 사랑하던 시절을 알기전에 그 사랑은 어찌 분류되어야 하는지 직접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학문적으로 이미 용어가 나와있을지도 모르지만, 위에 쓴것들과는 다르게 그 학문적 용어로 이것들이 결코 정의 될 수 없음을 나는 깨닫고 있다. 아마 어려울것이다. 거기에다가 내 스스로 무신론자 혹은 이신론자를 자처하고 있는 이 상황이라면 나느 결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을 향한 사랑에 대해서 깨닫지 못할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신을 사랑한다. 그들은 신을 사랑한다고 거리낌 없이 말하고 허공에 대고 외친다. 자신들의 공책에 끄적이고, 자동차 번호판에 갈끔한 글씨체로 I love God이라고 써둔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서 그렇게 자신있게 외칠 수 있다는것은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신을 사랑하던 시절이 있었는가.

by 은혈의륜 | 2008/11/27 10:06 | | 트랙백 | 덧글(6)

현시창 나름대로 파고들기.

잡담. 생김.

현시창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웹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단어들을 꼽자면 들어갈 이 말은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인 마이클 스코필드가 한 말인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라는 말에서 나왔다. 초기에는 꿈높현시 라고 줄여서 표현하기도 했지만 이제 대부분이 그저 간단히 현시창이나 현실은 시궁창이죠 예에-. 이러고 만다.

대부분이 그냥 넘어가면서 웃고마는 이야기지마는, 파이스님이 지적한 재밌는 부분은 간만에 뭔가를 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왜 현실은 시궁창이 된걸까?

웹과 현실이 다른점을 딱 하나만 꼽자면 외면의 창조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이야기 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사람들은 각자의 타고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다. 물론 사람들은 성형을 해서 바꾸긴 하지만, 그 성형수술들이 당신의 두개골을 완전히 드러낸후 조각해서 다시 얼굴에 끼워주는 기술이 아닌이상,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어떠한 표식이 남아, 오랜시간 알고 지낸 사람들은 성형을 한 후에도 별 문제없이 알아보기도 한다. 웹에서는 이 규칙이 통용되지 않는다. 누구던지 웹에 처음 들어오는 순간에 그들은 계란귀신과 다를바가 없다. 당신이 웹상에서 생산하는 콘텐츠들로 당신은 당신의 웹적인 외모를 채워나간다. 따뜻하고 좋은 글을 쓰면 사람들은 아무래도 당신을 온화하고 선한 인상의 따뜻한 사람으로 그리게 된다. 달빠와 같은 글을 쓰면 그냥 중2병에 걸린 한심하고 조그만 땅꼬마나 뚱뚱하고 여드름이 잔뜩난 돼지로 연상하는 사람이 많고, 날카로운 글로써 사회를 비판하면 당신은 그들에게 수첩을 쥐어주고, 안경을 씌워준뒤에 취재의 현장으로 내몬다. 한손에는 수첩, 한손에는 볼펜, 주머니에는 녹음기와 목에는 사진기가 걸려있다.

파이스님이 말했듯이 우리는 이곳에서 내면의 충돌을 경험한다. 웹상에서 일어나는 가장 독특한 행위다. 자신의 내면이 다른사람들의 의견과 평가에 의해 치장되지 않은채 다른 사람의 내면과 충돌한다. 마주치는것에 나아가지 않아서, 우리는 다른사람과 충돌하여 자신의 내면에 내밀한 상처를 입기도 하고 내면을 단단하게 잡아줄 지지대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에 나가면 당신이 저런것을 얻을 가능성이 극히 적어진다. 우리는 현실에서 목걸이를 사고, 향수를 뿌리고, 귀걸이를 걸면서 외면을 치장할 수 있다. 값비싼 핸드폰을 손에 쥐고, 벤츠를 운전하면서 자신의 부를 외면에 드러낼수 있다. NYT나 Economist를 손에 들어서 자신이 지적으로 모자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스타벅스 커피를 손에 들고, 일명 사과머리를 하면서 자신은 유행에 뒤쳐지지 않는 사람이라는것을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현실에서 내면을 채울 그 무엇도 얻기가 힘들다. 좋은 강의와 따뜻한 말은 현실에서도 쓰이는 것이지만, 그것들의 출현빈도는 웹상에 비해서 극히 적다. 그리고 불특정 다수가 아닌, 한정된 자원내에서밖에 얻지 못한다.

우리가 웹상에서 얻을수 있는것을 현실에서 얻을수 없다는것은 인간에게는 굉장한 아이러니다. 특히 어느정도 평등이라는 개념이 주입된 인간과 그 커뮤니티에게는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왜 현실과 웹은 평등하지 못한거지? 대체 내가 웹에서 얻은것들을 현실에서는 전혀 얻을수 없는거지? 이러면 현실은 웹보다 나은게 없는 시궁창이잖아? 썩었어! 현실은 시궁창이야! 라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아예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웹과 현실의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한곳에서 얻는것을 다른곳에서 얻을수 없을때, 그 다른곳은 누군가에게는 냄새나고 썩어빠진 시궁창이 되버리고 만다. 그렇기에, 우리가 인지하고 있던 인지하고 있지 못하던 우리는 현실을 향해 웹상에서 농담처럼 말한다. "현실은 시궁창."

P.S - 하지만 덕후들 사이에서는 3D는 2D 히로인을 따라잡을수 없어! 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뿌우 'ㅅ' 현실에 아테나 누님과 같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것과 같은 이치죠.

P.S 2 - 웹과 연관시킨 이야기기에, IT 밸리로 보냅니다.

by 은혈의륜 | 2008/10/12 14:02 | | 트랙백 | 덧글(6)

작은 소녀 이야기.

작은소녀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신이시여,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세요. 신은 그 기도를 듣고서는, 그 성신(聖身)을 황금보좌에서 일으켜 그 소녀의 앞으로 내려왔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없잖니. 신이 말했다. 소녀는 감았던 눈을 뜨고, 자신의 기도에 대답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평범하게 생긴 중년남자 하나가 빙글 웃으면서 소녀를 바라보더니 다시 말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데 신이 어떻게 그를 지켜줄수 있을까. 다른 기도를 해보는게 어떠니. 소녀는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다. 아저씨가 뭘 알아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신이 대답해주었다. 좋아한다는건 말야, 상호적으로 일어나는 화학작용인거지, 너처럼 그냥 일방적인 화학작용이 아냐, 그러면 결과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소녀는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언젠가는 알아줄거라구요. 그 언젠가가 도대체 언제인데. 신이 곧바로 되물었다. 언젠가요. 소녀가 말했다. 이미 자신이 없어보였다.

그래서 신은 소녀의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는 대신 소녀를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신은 일년간 차근차근 소녀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이년뒤에, 소녀는 다시 기도를 드렸다. 신이시여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세요. 신은 다시 내려가서 소녀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사랑을 하고있구나. 다행이네. 소녀는 자신의 기도에 대답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삼년전의 그 아저씨네요. 변하신게 없군요. 신은 한번 웃은뒤 말했다. 그건 넘어가고, 사랑은 할만해. 라고 물었다. 소녀는 그 질문을 듣고 울었다. 신은 그 앞에 가만히 앉아서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삼일 밤낮을 울었다. 신은 그 눈물을 몇방울 채취해서, 병에 담아 소녀에게 주었다. 그 눈물방울을 삼년간 잃어버리지 않고 먼지가 없게 관리한다면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무사할거야.

그렇게 삼년이 지났다. 소녀는 그 삼년간 자그마한 유리병 속에 떠다니는 눈물방울을 보면서 울음을 삼켰다. 눈물을 받은지 삼년이 되던날, 그녀는 다시 기도를 드렸다. 신은 다시 그 앞에 내려왔다. 내일이 삼년째구나. 네. 한참동안 침묵이 감돌더니 신이 소녀에게 유리병을 요구했다. 소녀는 유리병을 건제주었고, 신은 그 유리병을 땅바닥에 던져서 부숴버렸다. 눈물은 바로 땅으로 흡수되었다. 눈물이 흡수된 자국은 남지 않았다.

그 다음날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왔다. 왼손의 네번째 손가락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그녀는 그런 그를 힘껏 포옹해주었다. 그도 그녀를 포옹해주었다. 사랑해. 소녀가 말했다.

다시 이년이 지났다. 소녀는 다시 기도를 드렸다. 신은 다시 어김없이 나타나 물었다. 사랑은 재밌나보네. 네, 재밌어요. 나는 사랑을 못하는 처지라서 영 이해가 안되는걸. 소녀와 신은 한참동안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소녀는 신에게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세요. 신은 사라졌다.

소녀는 여자가 되더니, 순식간에 어머니가 되버리고 말았다. 아이들이 학교에 갔을때 어머니는 기도를 드렸다. 신은 다시 나타났다. 양육은 재미있어 라고 물었다. 네, 가끔 힘들지만 저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견딜수가 없거든요. 신은 대답했다. 그런가, 나는 양육을 해본적이 없어서 영 알수가 없네. 그리고 신은 웃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이, 잘 키워봐. 사랑 할 수 있는 아이로. 네.

그로부터 십년이 지났다. 한 소녀가 성당에서 부모님의 옆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신은 옆자리에 앉아서 소녀의 귀에 속삭였다.

응. 그렇게 해줄게. 그리고, 너도 사랑을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도록 아직 조금만 더 인내해보마.

아멘. 소녀가 말했다.

by 은혈의륜 | 2008/10/05 08:02 | | 트랙백

사람에게는 무너져 내리는 날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무너져 내리는 날이 있다고 한다. 이건 내가 친하게 지내던 대학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로 그 선배는 다섯번의 자살기도가 실패한뒤 나에게 이런 말을 전해주었다. 사실 이 문장을 제외하고도 다른 절절하게 아픈 문장들이 가득 채워진 편지 한장을 받았지만 다른 문장이 생각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지나버렸다.

야근을 위해서 사무실의 불을 끄고 내 책상에 덩그라니 놓여진 스탠드를 하나 더 켰다. 두개의 불이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눈을 몇번 깜빡이자 곧 적응이 되서 괜찮았다. 발열이 심해 잠시 꺼둔 노트북의 전원 스위치를 누르고 윈도우가 구동되는 동안 나는 종이컵에 뜨거운물을 따른후 현미녹차 티백을 떨궈넣었다. 컵 밖으로 물이 조금 튀었지만 별로 신경쓸 정도는 아니었고, 노트북에도 튀지 않았다. 손으로 털어낸 후 그 손은 양복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윈도우즈는 완전히 켜져서 내게 비밀번호를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약간 긴 비밀번호를 자판을 두드려 넣은뒤 티백으로 우려낸 현미녹차를 마셨다. 아직은 조금 뜨거웠다.

야근은 삼일째다. 첫날은 자청한 것이었지만 둘쨋날과 오늘은 원래 내 담당이었다. 내 옆자리와 앞자리에 앉은 동료들은 어느정도 걱정을 했지만 나는 가서 맥주나 마시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들이 나가 나 혼자 남은 사무실은 당연히 적막했다. 유령과 귀신과 정령들이 가득 채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는이상 그들은 공기보다 미천한 존재일 뿐이다. 그들의 눈에도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나 역시 그들에게는 공기보다 미천한 존재일것이다.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사무실의 불을 내렸다.

야근이 계속되자 눈이 침침해졌다. 사무실에 있는 간이 화장실로 걸어들어가 세수를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그 선배가 생각났다. 그 선배의 팔목에는 가느다란 선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처음 만난날 물었을때 그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그 선배가 네번째의 자살시도를 실패 했을때 나는 그것이 자살을 기도한 흔적이라는것을 알았다. 옆에 자살을 갈구하는 인간이 있다는것은 흥미로웠다. 심리학을 전공하던 학생으로써 그런 사람은 가장 흥미로운 대상이었고, 나는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거짓 친분을 쌓다가 진짜로 친해져버렸다.

눈을 두어번 깜빡이자 그 선배는 사라지고 다시 스탠드 두개가 비추고 있는 내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너저분하게 널린 종이쪼가리와 종이컵, 여기저기 펜이 굴러다니는 지독한 꼬라지였다. 나는 한번 피식 웃고는 서류를 다시 집어들었다. 오늘만 하면 괜찮을거야. 오늘만 하면 괜찮을거야. 집에는 아무일 없을거고.





내게는 대학 선배가 하나 있었다. 다섯번의 자살 미수 경력을 가진 특이한 선배로써 나에게 사람에게는 어느 하루,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날이 있다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지금 그 사람은 뭐하냐고?

지금 내 꼬라지를 나보다 먼저 실천하셨다.

쿵.

by 은혈의륜 | 2008/09/03 11:40 |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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